여행 이야기

중국: 보봉호, 황룡동굴 (2005년 1월 15일)

석탈해 2009. 8. 31. 15:14

   아침 식사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삭계곡 자연 보호구안 보봉호(寶峰湖) 관광을 했다.

 

 

 

 

 

 

 

 


보봉호는 봉우리 위에 있는 보배같은 호수라고 그 뜻을 풀어서 해석 하면 될 것 같았다.
산 가장 자리 계단을 오르니 두부모를 칼로 자른 듯한 바위산 틈으로 에메랄드 물빛의 호수가 보였다.
유람선을 타고 보봉호를 한 바퀴 도는데 갈 때는 토가족 처녀가 정박해 놓은 배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올 때는 반대편에서 토가족 총각이 노래를 불러 준다.
물빛과 그 물에 비친 산세가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 배에도 한국인이 대부분이었으나 한족 몇 명이 있었다.
가이드는 그들이 몇 명만 모이면 시끄럽다고 오리 떼라고 했다.
그 오리 떼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이 몇 배가되는 한국사람 소리보다 더 컸다.
그래서 가이드가 지금 여기서 한국사람인지 아닌지 가려보겠다 한다.
'대~한~민~국~' 가이드가 외치자 모두 손뼉을 친다.
' 짜쟌쨔~ 쨘쨘'
역시 오리 떼들은 손이 없었다.
보봉호에서 산 속으로 수로를 내어 반대편으로 큰 폭포가 떨어지게 만들어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어서 황룡동굴로 향했다.
황룡동굴로 가는 길에 또다시 '천원' '천원'하며 장사꾼들이 달려든다.
군밤도 천원, 머플러도 천원, 고구마도 천원...
잘 씻지도 않은 듯 꽤재재한 손에 때가 낀 손톱으로 고구마를 집어들고 천원 천원 하는데
그만 입맛이 싹 가시고 말았다.
황룡동굴안에 가기 전에 입구에 있는 공중화장실로 갔다.
대변보는 곳은 칸막이는 있었지만 문이 없고 변은 계곡 물을 끌어들여 씻겨 내려가게  한 것 같았다.
다들 묘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온다.


 


 
위생간으로 써 놓은 이 표지판을 고생간으로 읽는 사람이 있는데
화장실 갔다 온 뒤로는 그렇게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이드의 말대로 외투는 벗어서 차에 두고 동굴에 들어왔지만 내부는 상당히 더웠다.
중국은 나라도 크고, 집도 크고, 동굴도 컸다.
안에서 배를 타고 10여분 지나서 또 들어가니 엄청난 넓이의 광장이 나왔다.
그런데 자연의 동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조명을 비췄으면 좋으련만 형형색색의 조명이 오히려 천연의 동굴을 관람하는데 혼란케 했다.  

오후에는 금편계 풍경구 7km를 도보로 지나며 산 아래에서 위로 솟은 기암괴석을  보았다.
이곳 장가계 일대는 계곡 입구에 금편암과 취라한이라는 두 개의 바위 봉이 우뚝 솟아 있어 선경의 입구라고도 할 수 있다.
금편계곡의 길은 평탄하고 잘 정비되어 있다.
그래서 장가계를 여유 있게 산책하기에 적당한 코스이다.

 


 
[토가족 여인들은 등뒤에 항상 바구니 같은것을 메고 다닌다. 일종의 핸드백 같은 거라고나 할까.]

 


 

 

가마 터미널이라고나 할까...?. 장가계 곳곳에서 '만원' '만원' 하는 가마꾼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말 믿었다간 낭패 볼 수도 있다.
'만원'. '만원'은 기본적으로 앞 뒤 한사람씩 가마를 메니까 이만원이 되고, 가는 거리도 가마꾼 마음대로라고 한다. 이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금편계곡을 지나던 중 야생의 원숭이 가족을 만났다.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로부터 과자를 얻어먹고 있었다.
매일 그렇게 지냈는지 과자 얻어먹는데도 익숙했지만, 여전히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태도다.
원숭이 일가는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한동안 산길을 따라왔다.

 

 

 

 

 

 

[장가계 공항 내부]


장가계는 그야말로 시골공항이다.
아쉬운 것은 비행기 시간도 일정하지 않은데 승객들이 편안히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라도 좀 많이 두었으면 했다.
화물 검색도 심해서 소주 팩이 몇개  내 가방에 들어있었는데 화물보험료로 이천원 내야만 했다.
이날 저녁 늦게 장가계에서 다시 서안으로 날아 왔다.
우리가 묶을 호텔은 서안 빈관이었다.
오늘도 설마 별 네개가 두개로 떨어지진 않겠지.
피곤한 여정에 모두 잠에 골아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