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불은 그의 아버지 돌고가 역모를 꽤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자 궁궐에서 도망쳐 나왔다.
아버지 돌고는 고구려 봉상왕의 아우였는데 봉상왕은 항상 자기 자리를 노리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며 죄를 덮어쉬워 죽였는데, 동생 돌고도 그에게는 잠재적인 정적일 뿐이었다.
울불이 몸을 피해 정신없이 달아나 숨어 든 곳이 수실촌이라는 곳이었다.
울불은 그곳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부잣집 주인은 매우 고약하여 그를 잠시도 쉬게 두지 않았다.
심지어 밤에 주인의 단잠을 방해하는 연못의 개구리에게 밤새워 돌을 던져 조용히 시키도록 할 정도였다.
참다 못한 울불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났고 새로 시작한 일이 소금장수였다.
그러나 만만찮은 세상 살이는 이번에도 그에게 시련을 주었다.
행상 나갔다가 하루 묵은 집의 주인 노파가 잠든 울불의 짐꾸러미 속에 자기 신발을 숨겨두고 그를 도둑으로 몰았다.
아직 세상 물정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는 꼼짝없이 죄를 뒤집어 쓰고 볼기를 맞아야 했다.
울불의 귀티 흐르던 얼굴은 고생으로 파리해졌고, 남루한 차림새까지 더해져 왕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백성의 고단한 삶 속에서 체득한 경험은 그의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던 봉상왕은 신하들에 의해 쫒겨났고 봉상왕은 자결하고 만다.
그리고 이 곳 저 곳을 유랑하던 을불을 찾아내어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미천왕이다.
당시 요하 이서를 비롯한 대륙의 정세는 험악했다.
북방 유목 세력들이 남하해 각축을 벌이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대외 관계가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중국 동북부에는 선비족 모용씨가 등장해 고구려를 압박해오던 중이었다.
왕위에 오른 울불, 미천왕은 수세로 일관했던 종전의 대응방식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모용씨와의 관계는 반전되었다. 침체에 빠졌던 고구려는 미천왕의 즉위로 활력을 되찾았다.
이 처럼 고구려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혹독한 세상살이를 통해 안목을 키운 미천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을불이 겪은 개인적 고난은 고구려가 험난한 국제환경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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