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중국이 공식적으로 13억을 돌파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은 인구는 얼마인지를 모른다고 한다.
이번에 가게 되는 중국은 가족여행이다.
새벽 일찍 출발해 김해공항에 도착하니 가이드와 만날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다.
애들도 처음으로 비행기타고 여행가기에 들떠 있는 모습이다.
10시 50분 우리를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는 김해공항을 이륙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아들 두녀석은 신이 났다.
3시간 비행 끝에 서안 인근 함양공항에 곧 내린다는 방송이 나온다.
안개가 자욱해 창밖으로 아래가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활주로가 보이며 비행기는 공항에 안착했다.
우리나라 보다 한시간 늦은 중국시간으로 12시 50분(이하 중국시간) 이었다.
공항 청사로 들어서는데 안개 섞인 매캐한 공기가 탁하다.
짐을 찾고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
이곳 시안은 주나라때 호경, 진나라때 함양, 당나라때 장안으로 불리던 곳이다.
서안(Xian)은 북경, 남경, 낙양, 개봉, 항주와 더불어 중국 6대 고도로
우리나라 같으면 경주와 같은 역사 도시다.
먼저 찾아간 곳은 진시황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방궁이었다.
아방궁은 공항에서 쭉 뻗은 관중평야를 가로질러 갔는데 역시 산은 보이지 않고 넓은 평야만 펼쳐진다.
주변 허름한 농촌 민가들은 사람이 사는지 모를 정도로 허름하다.
군데군데 담벼락에 적힌 붉은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벌써 새벽부터 잠을 설친 아들 두 녀석은 버스에서 골아 떨어졌다.
40분을 달리니 아방궁이 나타났다.
사실 현재의 아방궁(阿房宮)은 진시황이 연인원 70만 명 이상을 동원하여 만들었지만 진의 멸망과 함께
불타 버린 것을 97년도에 십분의 일로 축소해 만들어 놓았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 1,000m의 크기로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의 유적지는 동서 1,300m와 남북 500m의 60만 평방미터의 면적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정복하는 과정에서
북경, 함양의 궁궐들을 다시 짓게 했는데 이것을 "육국궁전(六國宮殿)"이라 불렀다.
한번은 진시황이 각지의 12만 영주와 부상(富商)들을 함양으로 모았는데, 함양궁에 숲처럼 빽빽이 들어서서 입구까지 꽉 찼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남쪽으로는 위강(渭江), 북으로는 고원을 접하고 있어서 앞으로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진시황은 위강을 메워 남쪽의 평원까지 확장시켰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西周)의 풍고근처에 아방궁의 전전(前殿)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방(阿房)'이라는 것은 '근방(近旁)', 즉 함양의 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殿宇)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달랐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六國)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 때까지도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項羽)가 군사를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이곳은 1961년에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아방궁을 보고 장안로를 접어들어 한참가니 서안의 상징인 대안탑이 눈앞에 들어온다.
대안탑은 대자은사에 위치해 있으며 인도의 안합에 의하여 설계되어 당의 고종 때인 652년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오층으로 외부는 벽돌, 석회 그리고 내부는 흙으로 채워졌다고 하며, 현재는 64m 높이의 7층 전탑이다.
여기에는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봉해 두었다고 한다.
서유기 소설에 등장하는 삼장법사는 현장법사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현장법사의 제자 중에는 유식불교에 능했던 통일신라 출신의 원측이 있었다.
그 원측의 초상화 탁본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서안에서는 아직도 길을 건널 때는 횡단보도라도 사람보다 차 우선인 것 같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도 사람들 사이에 틈만 보이면 차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정지선 안 지켰다고 벌금 매기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할수 없는 일이다.
저녁식사를 하고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대안탑 앞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가계로 가는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함양공항에 7시30분 경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규헌이는 공항에서 다리 아프다며 주저앉았다.
중국 국내선은 비행기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게 흔하다는 것은 2년전에 벌써 보았었다.
와야 오는 거고, 가야 가는 거다라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오후 9시 10분 장가계행 비행기가 출발했다.
한시간을 비행해 가서 장가계에 곧 도착한다는 중국어와 영어 방송이 있었다.
10시 10분, 비행기 바퀴 내리는 소리가 나고 서서히 하강하는가 싶더니 거의 착륙 시점이라 생각될 즈음에 갑자기 비행기는 기수를 올려 급상승했다.
승객들이 어리둥절했다. 영문을 몰라서 불안해하기도 했다.
장가계행 승객의 90퍼센트는 한국사람인 것 같았는데 승무원 중에 한국말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한국인 중에 중국어를 하는 여자 가이드가 있어서 상황을 알게 됐고 가이드가 승무원 대신 우리말로 방송했다.
장가계 공항에 안개가 너무 많아 비행기가 내릴 수 없어서 중경으로 회항한다고 했다.
중경은 장가계에서 다시 1시간을 날아왔다.
중경공항에 착륙후 항공사의 조치를 기다리기 위해 기내에 잠시 머물렀다.
결국 항공사가 보낸 버스를 타고 공항 인근 중경공항호텔에 하루를 묶게 되었다.
4성 호텔이 2성 호텔로 격이 떨어졌다.
밤 1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외숙부 님, 이모부 님과 소주 한잔 기울이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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