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86년 그해...

석탈해 2010. 11. 4. 16:53

 

 

1986년, 내가 대학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동안의 작은댁 신세를 벗어나
서울 길음동 한구석 후미진 곳에 자취방을 얻었다.
학교 옆이면 좋겠지만 그 당시 학교주변의 방세가
시골에서 농사짓고 젖소 몇 마리 키우는 우리 집 사정으로 볼 때는 만만치 않았다.

길음 시장을 좌측에 두고 들어가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비켜가기도 어려운
좁은 미로 같은 골목 안에 집이래야 그저 교실 한 칸 정도의 터를 차지한
붉은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 집들 중 어느 집 방 한 칸에 둥지를 틀었다.
집주인은 50초반의 과부로 시장 통 다음 골목에 막걸리를 사발로 파는 대포가게를 하는데
앞 골목의 내 자취방이 있는 집과 등을 서로 맞대고 있었다.

붉은 기와를 올린 나무 대문을 밀면 꼭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비집고 들어가면 기역자 형태의 붉은 기와집의 대문 안 왼편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그리고 그 옆으로 부엌과 붙은 안방이 있고
안방 앞 그리니까 대문 바로 맞은편은 제법 큼직한 마루가,
그 오른편에 내 방이 있었다.

내 방 앞에는 30센티 정도의 작은 마루가 있었고
방문은 창호지를 바른, 그야 말로 옛날씩 여닫이 문이 두 짝 있었다.
맞은편은 원래 장독대이었는데
두 벽면은 원래 있는 시멘트 블록으로 된 담을 이용하고
나머지 두 벽면은 블록으로 쌓아 올려 만든 방 한 칸의 독채(?)가 있었다.

독채 방문은 내 방과 불과 2미터 정도를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그 방엔 계절에 관계없이 딱 붙는 고동색 털모자를 쓰시는
일흔을 훨씬 넘긴 할머니가 한 분 살고 계셨다.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밤이었다.
12시를 넘긴 시간에 화장실에서 '나죽어~~나죽어~~'라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하여 달려 나가봤더니 안방을 쓰는 사우디 아줌마가 나왔다.
사우디 아줌마는 남편이 당시 사우디에 건설 노무자로 일하러 가고
유치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세 들어 사는 아줌마였다.
적당히 부를 호칭도 없고 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학생! 놀라지마. 할머니가 변비 때문에 그러시니깐'
'그래요~ 요즘 좋은 약도 많은데…….'
'할머니가 그럴만한 여유가 안돼서'

그 뒤 며칠 안 가서 할머니 이야기를 사우디 아줌마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예전…….그러니까 할머니가 처녀였던 때
할머니의 어머니는 평택에서 유명한 무당이었다.
할머니도 그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굿하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들도 낳았는데
얼마 뒤 병으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또 몇 년이 지난 뒤 딸을 하나 둔 남자와 재혼했는데
박복하게도 이삼년 살지도 못하고 재혼한 남편은 사고로 죽었다.
여자 혼자서 재혼한 남편의 딸까지 키우기는 힘들었고
6.25전쟁 당시 월남한 남편인지라 딸애를 맡아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는 수 없이 재혼한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은 고아원에 맡겼다고 한다.
할머니는 광주리에 동동구리무 등 온갖 방물을 이고 동네방네 다니며
장사를 해서 아들을 키웠다.

아들은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됐고
결혼도 해서 며느리도 보았다.
하지만 곧 안아 볼 것 같았던 손자가 몇 년이 지났지만 생기질 않았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칠거지악으로 몰아 구박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들이 다방아가씨랑 바람이 났는데
이 참에 며느리를 아예 갈아치우려 했다고 한다.
아마 며느리는 이때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뼛속에 사무쳤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여자관계를 정리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단다.
그 후 태기가 있고 아들을 낳아 그토록 바라던 손자를 안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할머니를 주도권을 잃은 뒷방 늙은이가 되게 하였고
며느리는 실세가 되어 예전과 다른 상황이 되었다.

십 년 전쯤, 손자가 대입에 실패한 후 서울의 종합학원에 보내기 위해
할머니와 손자가 방을 찾던 중 공교롭게도 두 번째 남편의 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다음 골목에서 대포집하는 이 집 주인이다.
집 주인 아주머니도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혼자서 벌어 이 집을 사서 세주고 있었다.
친척도 없고 외로운지라 친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 지금의 장독대 자리에
가건물로 방 한 칸을 마련해 손자 공부시키고 사시도록 했다.

손자는 삼수 만에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하고 직장 얻고 결혼할 때까지
할머니가 옆에서 돌봐줬다고 한다.
손자가 떠난 뒤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못하고 실세(?)에 밀려서인지
길음동에 머물러 계시게 되었다.

내가 방을 얻어 앞방에 들어가니 할머니는 나를 마치 손자처럼 생각해 돌봐주셨다.
학교가면 연탄불도 갈아주시고 집에서 밥을 해먹을 때면 집주인 아주머니가
가끔씩 가져다주신 밑반찬도 나눠주신다.
한번은 손수 끊이신 된장찌개(?)를 갖다 주셨다.
된장찌개라야 길음동 시장 채소 전에서 배추 시래기 주워 다가 된장만 넣고 끓인 것이다.
그런데 된장이 오래된 것이어서 그런지 시금털털한 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한 술 뜨다가 그만 두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주신 성의가 고마워 비닐 봉지에 싸서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릇은 깨끗이 씻어서 '할머니 잘 먹었습니다.'하고 갖다드렸더니 그 후 며칠 안 가서
할머니는 '학생! 이거 잘 먹지?'하면서 된장찌개 대접을 내미셨다.
'고맙습니다!'하고 받았지만 또 할머니의 성의를 쓰레기통으로 보내고야 말았다.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의 조카라는 서른 중반의 남자가 할머니 방으로 옷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그것도 만삭인 부인과 함께...
지금도 그 이름은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자주 교과서에 등장했던 이름이니까.
김영철(가명이라 하자. 그도 프라이버시가 있을 테니)...
그는 매일 술에 절어 있었다.
그리고 만삭인 부인을 사정없이 때렸다.
씻는 모습은 거의 본적이 없고
옆에 지나면 막걸리 쉰내에다 땀내가 뒤섞여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차라리 하수구 청소하고 오물 쌓아놓은 옆을 지날 때 나는
시궁창 냄새는 오히려 향기롭다라고 해야 할 듯 했다.

그 해 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적어도 나의 느낌으로는...
내 방문 2m 앞의 할머니 방의 방문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밤이 되도 내 방문을 닫아두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김영철의 부인은 임신한걸. 감안하더라도 살이 많이 쪘다 싶은 정도였는데
손찌검은 여름이 되도 계속되었고 부부싸움에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다.
얼마 뒤 부인은 딸을 낳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안 되어 핏덩이를 두고 가출하고 말았다.

갓난아기가 배고파서 우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한밤에 들으면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밤새도록 머리맡에서 배고픈 고양이는 울어댔다.
아기가 너무 불쌍했다.
할머니는 쌀을 갈아 미음처럼 만들어 먹이기도 했다.
나도 간식으로 먹으려고 시골서 가져왔던 가루우유(어린이용 분유가 아님)를
허기라도 면하라고 건네주기도 했다.
당시 낙농을 하던 우리 시골집은 우유소비가 부진하면 우유회사에서
우유대금의 일부를 가루우유로 지급했다.
할머니가 너무 고맙다며 손을 잡아주었지만 애기는 설사를 했다.

김영철은 다리를 조금 절룩거린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가 좀도둑으로 교도소도 몇 번 갔다 왔다고 귀띔해 주었다.
뾰족한 직업도 없는 김영철의 돈벌이는 각목하나 집고 보통 때보다
눈에 드러나게 절룩거리며 길음 시장 노점 골목에 가서 상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상인들에게 구걸 아닌 구걸을 한다.
처음 장삿길 에 나선 사람이 모르고 거절했다가 각목이 채소더미를
몇 차례 내리치는 바람에 장사 망친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이래서 백 원, 이백 원 정도씩 얻는다.
그가 가장 정직하게 돈 버는 것은 늦은 저녁 시장이 파한 뒤 돌아다니며 빈 박스
등을 모아 두었다가 팔아먹는 것이다.
그러나 몇 푼 주머니에 있다고 그 돈으로 분유라도 사오는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
모두 술 마시고 마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항상 술에 절어 붉었고 눈동자는 흰자보다 붉은 핏줄이 더 많이 보였다.

늦은 밤이지만 더위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삐걱 소리가 들리고 이어 김영철의 신발소리가 방바닥과 베개를 통해서 전해진다.
한잔하고 오는 모양이다.
술 먹고 열이 많이 나는지 내 방문 앞의 작은 마루에 가로로 누워 코를 골며 잔다.
방문이 마루 쪽으로 열리기 때문에 화장실 갈 일이 가장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좀도둑 경력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론 방문 고리에 숟가락을 끼워 잠그고 잠을 잤다.

시원스런 소나기가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간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따라 일찍 집에 들어선 나는 마당 수돗가에서 옷을 빨고 있는 그와 마주쳤다.
평상시 빨래하는 걸 본적이 없었는데 웬일인가,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 생각했다.
나를 힐긋 보더니 '흠~~흠...학생 우리집안에서 최고 학벌인 내가 빨래두 다하구…….'
'아저씨, 빨래해서 깨끗하게 입으시면 좋잖아요. 그런데 어디까지 나오셨는데요?'
큰기침을 다시 한번 한 그는 '내 동생들은 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나왔는데 난 중학교도 다녔잖아…….
중간에 그만 뒀지만'…….'
이어서 내뱉듯이 한마디 던졌다.'학생, 울 마눌 찾았어.'
'아저씨 그럼 아주머니 돌아오세요.'
내말에는 대답을 않은 채 계속 떠들었다.
'울 마눌 돈 얼마나 잘 버는지 알아. 요앞 길 건너 텍사스에서 찾았는데 한 시간에 오만 원, 육만 원 벌 때도 있어…….'
그런걸 자랑이라고....정말 미친 녀석이었다.
물에 젖은 빨랫감은 한번씩 짓이겨 질 때마다 오징어 먹물 같은 검은 물을 계속 토해내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계절은 가을 무렵으로 접어들던 일요일이었다.
내 방에는 그저 가로 한 뼘 정도의 작은 흑백텔레비전이 있었다.
텔레비전 뒤에 붙은 안테나를 잘 조정하면 제법 화면이 깨끗하게 나왔다.
영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생겼다고 매스컴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밖에서 소리가 낮선 아주머니 소리가 났다.
내 방앞 마루에 아줌마 파마를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앉아서
건넛방의 문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와 얘기하고 있었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머님, 어머님 팔자가 이런데 어떡하시겠어요?'
바로 여기에 할머니를 내팽개친 며느리였다.
젊은 시절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를 이곳에 방치해둔(?) 며느리였다.
평택에 2층집을 짓고 살며,
할머니 아들은 이제 한 구역을 맡은 민생치안 책임자라고 하던데
정말 저럴 수 있나는 생각이 들었다.
문 사이로 내다본 며느리는 라면머리에 불어터진 얼굴모습을 하고 있었다.
매운 청양 고춧가루 한 통을 라면머리에 쏟아 부어 나무젓가락으로 휘젓고 싶었다.

밤 1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에이씨~ 애기 버리면 되지...부잣집 대문 앞에 말야...'
밖이 떠들썩하여 내다보니 포대기에 싼 아기를 김영철은 안고 밖으로 나가고
그동안 키운 정이 든 할머니는 뒤에서 김영철의 셔츠를 잡고 만류하다.
뿌리치는 손길에 뒤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두어 시간 뒤 녀석은 그대로 돌아왔다. 포대기를 앉은 채...삘삘 흐느끼며.
그런 사람에게도 부성애라는 게 있는 것일까?

며칠 후 사우디 아줌마와 집주인 아줌마가 안방 앞마루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나도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저 집 애기 말이야....이웃에서 소개해서 남 주기로 했대'
'에구~~ 잘 됐네' 사우디 아줌마는 연신 잘 됐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때 치과의사집에 입양되니 얼마나 잘됐어. 잘됐구 말구.'
'아버진 저래두 딸내미는 복이 있는가 보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그리고 그리 됐어야만 했다.
하지만 광우병에 걸린 인간 같은 김영철은 눈을 희번뜩이며 치과의사를 찾아가 돈을 요구했다.
치과의사는 단번에 거절했고 입양도 취소됐다.
얼마 뒤 아기는 집에서 보이질 않았다.
그냥 어디로 보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사우디아줌마 남편이 귀국했다.
그 동안에 알뜰히 저축한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했다.
이사하던 날 아침 사우디 아줌마는 나를 불렀다.
'학생! 이번 달 세금은 할머니 드려요. 약값에 보태시게.....'
고마운 아줌마다. 옆에 있던 할머니께 잔돈이 없어서  학교 갔다 오면
나중에 드리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매달 고정적으로 오천원을 낸 걸로 기억된다.
여기에는 전기세, 수도세, 쓰레기 처리비 등이 포함되었다.

길음시장 안에는 고추튀김, 오징어 다리 튀김, 김밥, 순대 등을 파는 코너가 몇 개 있다.
자취생의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가끔 들리는 곳이다.
그 중의 한곳은 나의 단골이었다.
아줌마가 주인 겸 종업원이었다.
나와 동향이라는 것만으로 아줌마는 가난한 자취생을 위해 듬뿍 담아 내주신다.
순대접시도 튀김접시도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늦은 저녁땐 밥 한 그릇도 얼른 비벼 내주셨다.
그날도 포항아줌마 순대집에서 배를 채우고 자취 집으로 들어서는데
김영철이 내 방문 앞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더니 대뜸
‘그~어 학생이 할머니 드릴 오천원 말인데...할머니 정신 없어 잃어 먹으니까 나를 주면 돼’
기가 찼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술값이 궁해졌나 보다......
김영철에게 오천원이지만 건넬 수는 없는 일이다.
‘예?...사우디 아줌마가 할머니 드리라고 하시던데요.’
그래도 김영철은 또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난 ‘지금 돈 없거든요. 나중에 드릴게요’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얼마 후 김영철 몰래 할머니 손에 돈을 건네주었다.

이틀 정도 지난 새벽녘이었다.
김영철이 내 방문을 흔드는 소리에 곤한 잠에서 깨어났다.
'아! 학생 자나...그 말이야 이번 달 세금 나왔는데 천원 줘라'
시계는 4시 30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술에 취한 목소리 였다.
'아저씨 이 시간에 천원은 뭡니까? 잠도 못 자게'
'아 글쎄 세금 천원 내라니까'
'아저씨이~ 아저씨는 이 집에 붙어살면서 아저씨가 왜 세금 거둬요 그리고
이 달 세금은 이미 냈고, 천원은 뭔데요'
김영철의 목소리는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했다.
'야 너 배웠다는 놈이 어디서 거짓말을 찍찍 하구 있어, 너 저번에 세금 나한테
준다고 해놓고..응 ...너 야..!!!'
문고리에 안으로 걸린 숟가락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새벽 적막을 김영철의 고함이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불쌍한 인간 알코올이 부족해 난리군...
졸리기도 하고, 결국 방문에 뚫린 창호지 사이로 천원 한 장을 던져 줬다.
'그만 하시고 이것 들고가서 술이나 퍼요'
상황은 이렇게 쉽게 종료 됐다.
거금 천원을 빼앗기고 말이다.

미아리고개 넘어 서울의 변두리...
그래도 지하철이 있기에 통학거리는 삼십분 정도면 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시장통을 지나며 석화탄 한 장을 샀다.
아무래도 여름내 꺼두었던 연탄을 지펴야 할까 보다.
어제 새벽은 제법 추웠다.
오늘도 동네 꼬마들은 여기 저기 골목을 누비며 폭음탄으로 장난을 하는가 보다.
골목에서 펑펑 소리가 난다.
어떤 때는 닫친 대문을 열다가 실에 묶인 화약을 터트려 깜작 놀래기도 했다.
할머니가 학생 좀 보자고 하셔서 방문을 여니 친척 중에 회갑이 있어서
내일부터 며칠 평택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연탄불을 다시 한번 살펴 주셨다.

사흘을 방을 비우신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는 잔치에서 챙겨 오신 떡이며 과자를 앞방에 사는 손자(?)에게 주셨다.
고맙게 받았다.
너무 인정도 많으신 데 왜 아들 며느리는 인륜을 저 버리는지 안타까웠다.
옛날 엿장수가 뚝뚝 가위로 끌을 두들겨 잘라 팔던 호박엿도 있었다.
호박엿은 선반위 사발에 넣고 뚜껑을 덮어두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났다.
자취집으로 들어오니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 이제 아들집에 들어가 살게 됐어......'
한숨이 절반 섞인 목소리였다.
'아이구 할머니 잘됐습니다. 고향 가셔서 편안하게 지내셔야죠. 여기서 고생하지 마시고'
할머니는 치마를 들추더니 속바지 주머니에 채워져 있던 옷핀을 빼고
빛 바랜 편지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셨다.
'학생 이 주소로 나중에 편지해.'
시로 승격한지도 꽤 되었을 텐데, 평택읍때 주소 였다.
당신이 집 나오실 때 가지고 온 주소를 몸에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는 앞방을 떠나가셨다.
아니 고향 평택으로 돌아가셨다.
이제 할머니가 쓰시던 방엔 김영철만 남았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오셨다.
학생 그동안 고생했다며 가건물을 철거 하시겠단다.
애초에 장독대인데다 할머니를 위해서 만든 무허가 건물이었기에 헐어버리겠다고 했다.
속사정은 김영철이를 내보내는 게 목적인 것 같았고
나도 그렇게 해주는 집주인이 고마웠다.

며칠후 철거 공사는 시작됐다.
김영철은 가방을 사서 집 주인댁에 갖다두고
인부들이 방을 철거할 때 옆에서 얼쩡거리며 도왔다.
그러다 잠시 인부들이 쉬는 사이 철근 절단기를 몰래 들고 나갔다.
인부들이 절단기를 찾았을 땐 김영철이 이미 고물상에 팔아먹은 후 였다.
가게서 소주잔 기울이고 있던 김영철은 잡혀서 파출소에 넘겨졌고
파출소서 조사 받다 도망쳤지만 시장 전화부스에서 집주인에게 전화해
가방 가져다 달라고 하다가 다시 잡혀 구속되었다.
그 후론 소식을 들은 바 없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답답하던 자취방 앞이 탁 트이니 속이 시원했다.
아침 저녁이 제법 쌀쌀해지던 어느날
월세를 가지고 다음골목의 집주인 대포집에 들렀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편찮아서 낮에 문병을 갔다 왔단다.
'죽일년놈들~~~'을 연발하신다.'
얼마나 할머니가 힘드셨을까.
이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실 정도였으면.
떠나 가실 때 눈가에 이슬이 맺혔던 할머니 모습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얼마뒤 할머니는 한 많은 생을 접고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전해 들었다.

내가 사는 포항의 겨울 날씨는 바람은 많지만 그래도 포근하다.
서울의 겨울은 추위가 매섭다.
가만히 있으면 한기가 뼛속까지 애린다.
그 해 겨울은 더욱 추웠다.
나의 길음동시대도 마감할 때가 다가왔다.
자취방을 정리하면서 할머니가 주신 엿이 그릇 바닥에 동그랗게
녹아서 붙어 있었다.
그릇을 씻으면서 다시 한번 할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1986년 그 해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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