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중국: 서안 비림, 화청지, 진시황릉 (2005년 1월 16일)

석탈해 2009. 8. 31. 15:17

 어젯밤은 여행온 이후 가장 편안히 잠을 잔 것 같다.
우리가 묶었던 서안빈관내의 식당에서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죽과 계란 등으로 식사를 하고 오늘 일정의 시작인 비림(碑林) 박물관으로 향했다.

 

 


[중국 서안 거리의 연탄 배달부. 우리 연탄보다 지름이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비석들이 모여 이루어진 숲 비림(碑林)은 섬서성 박물관 안에 있지만, 박물관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비림은 1087년 북송 철종 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 한(漢)대부터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비석과 1천여개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비석들이 모여 마치 숲을 이룬 것 같다 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총 3000여 개의 비석이 있으며, 그 중 개성 석경은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655,025자)을 조각한 것으로, 명사들의 전적비 등이 집중되어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 볼만한 곳이다.
이 곳에서 관제시죽비 탁본을 하나 구입했다. 탁본 자체는 비의 훼손을 가져올 수도 있기에
우리 같으면 이런 문화재를 그렇게 실제 탁본해서 판다는 것은 어림없겠지만 그런 비가 흔해서 인지 중국은 가능했다.  

 

 

 

 


[관제시비를 탁본하고 있는 박물관 직원. 이 탁본은 우리돈으로 3만원에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과거 합격자 6명은 뒤에 보이는 건물에 각각 들어가 마지막 실력을 겨루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양귀비와 현종이 겨울을 보내던 화청지(華淸池)로 갔다.
화청지는 여산(驪山)을 배경으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당대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온천수 때문에 역대 황제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특히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겨울을 지내던 곳이라 하며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화려한 누각들을 지었다고 한다.
호수를 중심으로 양귀비가 실제로 목욕을 했다는 목욕탕과 양귀비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아직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화청지를 돌며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도 생각해 봤다.
사실, 로맨스라기 보다는 불륜이다.
아무리 후궁 몸에서 난 아들이라도 자식은 자식이다.
그 아들의 부인, 곧 며느리를 데리고 살았으니 황제가 다스리던 당시라도 이 사건은 크나큰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곳은 1931년 당시 섬서 정부가 정식으로  "화청지"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붙였다.
또한 1936년 12월 12일에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열렸던 "서안사변(西安事變)"도 이 곳에서 발생했으며,
현재에도 여산 정상에는 "착장정(捉蔣亭)"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다.
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년 11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서안에 와 머물던 장개석(蔣介石)을 장학량(張學良)의 부하
양호성(楊虎城)이 감금한 사건이다.
결국 이사건으로 장개석은 국공합작을 하고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했던 것이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온천수에 비단잉어가 사는데 이놈들은 매일 온천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온천물은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신경통이나 관절염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연화탕--양귀비의 목욕탕]

 

 


 
[이곳은 탈의실이라 한다. 바깥의 홈으로 온천수가 흐르게 하여 탈의실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했다고 한다.]

 


 
[왼쪽위 높은 곳의 누각은 헤어드라이기가 없던 그시절에 양귀비가 목욕 후 사방에서 불어오는 자연풍에 머리카락을 말리던 곳이라는데...믿거나 말거나.]

 

 

 

 

 

 


 
[서안사건이 일어난 건물 五間廳]

 

 

 

다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돌아보았다.
진시황릉은 진나라 왕 정(政, 진시황의 본명)이 13세에 왕위에 오를 때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50세에 죽을 때까지
37년간이나 걸려 만들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5m에 달한다.
원래의 높이는 115m이었는데 그 동안 무너져서 45m정도다.
115m로 진시황릉을 만든 것은 진시황이 50세 까지 살았으므로 1년에 1장씩 해서 50장의 높이라고 한다.
실제 보니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무덤 꼭대기로 오르는 계단 양측은 석류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석류나무 뿌리가 무덤을 보호하기 때문에 심어뒀다고 한다.
진시황릉  내부는 아직 발굴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 좀 더 완벽한 발굴기술을 습득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는데...
금세기에 안되면 후대에 발굴의 숙제를 남기겠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우리 나라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이 제대로 발굴 준비도 없이 마구잡이로 유물을 들어내어 유물이 놓였던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게
되어 백제사의 중요한 실마리들을 놓친 것과 비교가 되었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목록>에 넣었다.

 

 

 

뒤로 저멀리 보이는 야산이 바로 진시황릉이다.

 


 
[진시황릉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이어서 진시황릉 내부를 모형으로 만들어 뒀다는 곳으로 향했다.
진시황릉은 발굴은 하지 않았지만 투시경으로 내부를 들여다보고 만들었다는 가이드의 말은 믿을 수 없었지만  
여행일정에 들어 있지 않아서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일단은 한번 보기로 했다.
아마 사마천이 지은 역사서 <사기>의 내용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하는 게 옳은 듯 했다.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지하궁전 앞은 천하 통일과 더불어 화폐, 도량형, 문자, 수레바퀴의 폭까지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부조로 만들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 불멸을 꿈꿨던 진시황 본인도 50세에 생을 마감했고, 만만세에 지속되기를 바랐던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도 2대에 쇠망하고 말았다.

 

 

 

 

 

진시황릉에서 버스로 5분 정도 가니 병마용(兵馬俑) 박물관이 나왔다.
정확하게는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거리에 있으며,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병마용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이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세계 어느 곳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 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갱내에는 60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이 묻혀 있었으며, 현재에는 1000개 정도가 진열되어 있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병마용 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세곳 중에서 1호갱이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230m, 넓이는 612m로 총 면적이 12㎢이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하지만 이미 발굴된 병마용의 채색된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져 색의 보존 문제때문에 고심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줄로 알았는데, 여기 저기서 찍어도 제지 하지 않았다.
교육자료로 쓰기 위해 몇 컷을 후레쉬 터트리지 않고 살짝 찍어보았다.
겨울이고 또 난방이 되지 않는 터라 내부가 무척 추웠다.
이렇게 중국여행의 4일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