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通化)시를 거쳐 오늘 묵을 숙소가 있는 집안(集安)으로 향했다.
중간에 도로 요금소 사무실 건물인 듯한 곳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잠시 쉬었다가 출발 하려는데 조중흠 선생님께서 페인트 칠 할 때 희석제로 사용하는 신나 담는 통 같은 네모난 플라스틱 통을 들고 차에 올랐다. 중국 고량주였다. 현지인들에게서 어떻게 구했는지 재주도 좋다. 약주 좋아하는 선생님들은 차량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다들 만든 곳도 불분명한 중국술을‘신나’라고하면서 신나게 마시는데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숙소인 집안(集安) 빈관에 도착해 내릴 즈음에는 성냥만 그으면 폭발할 것 같은 신나(?) 냄새가 버스 안을 가득 채웠다.
집안(集安)은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이다.
아무래도 졸본은 부여가 가까이 있어서 전쟁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터라 유리왕이 이곳으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비가 내리지만 아침 식사 전에 먼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어제 신나통을 들이킨 선생님들도 다들 멀쩡하시다.
20분 쯤 가니 광개토대왕비가 나타났다.
국사를 전공했고 18년이나 고구려 역사를 가르치며 수없이 이야기 했지만 사진으로만 보았던 광개토대왕비가 유리벽을 한 보호각안에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사망할 때 까지 동북아시아를 평정한 정복군주다.
중국에서 ‘호태왕비’라고 부르는 광개토대왕비는 그 아들 장수왕이 건립하였는데 높이 6.39m의 자연석의 4면에 1,755자의 비문을 새긴 비였으나 지금은 거의 마모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다고 한다.
또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 옛날 이 벌판을 가로 질러 달리던 광개토대왕의 말 발굽 소리인가 잠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군총이 있었다.
장군총은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7단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이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초기 고구려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돌무지무덤은 서울의 한강변에서도 발견되어 백제의 건국세력이 고구려에서부터 남하 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도 한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부부 합장의 묘이다.
아직 중국공안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이른 시간이라 이곳에서 백두산에서 펼치지 못했던 ‘아! 백두산’이라 적힌 현수막을 들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국내성으로 갔다.
아파트촌 사이로 허물어진 성을 지금은 그나마 일부를 복원해 놓아서 볼 수 있었다.
그 동안 가파른 언덕위에 있을 거라는 나의 상상속의 국내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국내성은 천연의 해자(垓子)라 할 수 있는 강을 앞에 두고 평지에 만든 성이었다. 유사시에는 인근 환도산성으로 옮겨서 적을 방어했다고 한다.
역시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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