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하라의 수선사에는 한말 의병장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관군과 맞닥뜨리게 되자 “너희들이 왜놈들이라면 싸우겠으나 같은 동족끼리는 차마 싸울수 없다..."며 스스로 의병을 해산하고 관군에 체포되었다. 일본군에 넘겨진 선생은 제자 임병찬과 함께 이 곳 대마도로 끌려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왜적이 주는 음식을 전폐하고 단식으로 항거하던 중 발병 한지 1개월 만인 1906년 11월 74세를 일기로 적지에서 순국하였다.
임병찬 일록에는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 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엎드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 선생의 평소 소양의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태한 아이나 사산한 아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장 보살에게 어린이용 빨간 턱받이를 둘러 놓았다. 주변에는 사탕이나 장난감 등을 놓아 두기도 한다.
수선사 법당 내부...수리 중
금석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가 있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한갑 나이에 늦게 얻게 된 딸로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자랐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으나, 1925년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1931년 쓰시마섬 번주의 아들 소오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였고 결혼 생활은 딸의 자살, 정신 질환으로 순탄치 못했고 결국 이혼하였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이혼 후 이를 쓰러트렸다가,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2001년 다시 세웠다. 덕혜옹주는 1963년에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1989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대마도 역사 민속 자료관 정원에 있는 조선 통신사 비
고려문
대마도 역사 민속 자료관과 전시 유물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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