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이야기

종군위안부와 한국인의 체면의식

석탈해 2012. 3. 8. 18:03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는 '종군위안부'를 대신할 국제 공인 용어다. '전쟁 중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한 '쿠마라스와니 및 맥두걸 보고서'가 유엔인권소위원회에서 채택된 1999년부터였다. 이 해는 '종군위안부'명칭이 사어가 될 원년이었다. 2001년 필자도 일본정부가 주변국의 뭇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욕해소 도구로 강제동원한 과정과 일본군 '종군위안부', '정신대'호칭의 유래 및 허구성을 파헤친 글에서 이 용어들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런데 약칭 '맥두걸보고서' 후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한국에선 '종군위안부'와 '정신대'용어가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 있다. 대다수 언론매체와 관련 시민단체의 관성 속에서! 이러니 일반인들이야 호칭을 바꿔 부를 리 없다. '맥두걸'보고서를 성안했던 게이 맥두걸 전 유엔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이 지난 17일 한국을 방문해 다시금 '종군위안부' 명칭의 기만성을 언급한 것은 어쩌면 부박한 우리사회의 역사의식과 무신경을 에둘러 비판한 일침인지도 모른다. 그는 '위안부', '위안소' 따위는 범죄행위를 희석코자 한 일본의 저의가 담긴 어휘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최초 이 호칭을 사용한 이유는 원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 생존하고 있는 피해여성들을 두고 '성노예'라고 부르기엔 왠지 미안하고 송구스런 마음이 드는 것도 요인이다. '노예'라는 어감이 주는 야만성을 이 단어의 발화자가 뒤집어써야 하는 심리적 저항 때문이다. 이는 타인에 대한 수치와 배려가 교직된 유교문화, 즉 체면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종군위안부와 정신대라는 말의 감춰진 의미를 알면 답은 분명해진다. '종군위안부'란 자원한 종군기자나 종군간호사들과 같이 그들이 마치 자발적으로 참전 일본군 병사들을 '위안'한 것처럼 일본당국이 꾸며낸 말이다. '정신대(挺身隊)'는 '몸을 내밀다'에서 '헌신하다', '희생하다'로 의미가 확장된 '정신(挺身)'이 표상하듯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 구국대'를 가리킨다. 여기엔 개인의 희생이라는 행위의 자발성과 능동성만 강조돼 있을 뿐, 강제성과 피동성은 증발되고 없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피해여성들은 애시당초 일본군을 따라 '종군'할 의사도, '위안'할 의무와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꼼수처럼 저급한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 이 호칭들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국가차원에서 획책한 반인륜적 범죄행위를 피해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종군'한 행위라고 호도하는 일본정부의 주장을 인정하는 꼴이다.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이 당사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면 최소한 종군위안부와 정신대라는 용어만큼은 쓰지 말아야 한다. '일본군 강제 성 피해여성'과 같은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야 한다.

일찍이 공자가 설했듯이 바른 명칭, 즉 정명(正名)을 써야 세상이 바로 선다. 사물의 본면목을 적확히 표현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실상은 알기 어렵다. 사안의 본질에 도달할 수도 없다. 사필귀정은 일본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정명을 통해 힘을 받게 될 때 가능해짐을 유념할 일이다.

 -----------   서상문 한국해양 전략연구소 선임 연구원 (경북일보 2012-03-05 기사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