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야기

경주 최부자 집

석탈해 2011. 2. 5. 09:58

12대 400여년간 만석꾼이었던 경주 최부자...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경주 최씨 고택을 찾아가 보았다.

경주 최씨 고택은 현재 경주 교동에 있으며 중요 민속자료 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 부자집에는 독특한 만석꾼의 철학이 있었다.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흉년이 들면 자신들의 곳간을 헐어 기민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어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고 한다.

부자들에게는 흉년은 농토를 싼 값에 구입하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최부자집에서는 흉년에는 절대 땅을 사지 않았다.

인심좋은 최부자집은 수 많은 과객들의 쉼터였고, 어떤 손님이라도 극진히 대접하고 노잣돈과 하루 양식 챙겨 보냈다고 한다.
특권층의 의무를 넘어, 사회 선을 실현했던 경주 최부자집은 활빈당도 이 집만은 털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씨 고택은 문간방,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1970년에 작고한 최준(崔浚) 선생은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였다.

 선생은 일본에게 국권을 잃자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 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루었다고 한다.

최준 선생은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과 더불어 백산상회(白山商會)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웠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한때 만석꾼의 고방이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다.

 

 'ㅁ'자 모양의 안채

 

 

 

 

 

 육훈과 육연을 자손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사사당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교동 법주 제조장이 있다.

 

해방 후 전재산을 대학에 기부했던 마지막 만석꾼 경주 최부자.

최부자집은 한국 역사상 유래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명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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