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설 극장

석탈해 2011. 9. 4. 08:20

 

 

영일민속박물관에 있는 오래된 영화 포스터이다.

1957년에서 1961년 사이에 상영된 영화라고 하니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국산영화 '애련의 꽃송이', '타향사리', '주마등'과 함께 1957년 상영된 '결단의 3시 10분'이라는 외화 포스터도 있다.

'결단의 3시 10분'에 적힌 포스터의 문구가 재미있다.

 

惡(악)과 正義(정의)의 對決(대결)!

爆發(폭발)하는 興奮(흥분)과 迫力(박력)!

一秒一秒(일초일초)로 切迫(절박)하는 運命(운명)의 決斷(결단)!

新春最大(신춘최대)의 話題(화제)를 가진 異色西部劇大作(이색서부극대작)!

 

 

냇가라는 고급스런 단어는 초등학교에 가서 알았다.

그냥 냇가는 거랑이라 불렀다.

거랑에서 빨래하고, 물고기 잡고, 멱을 감았다.

그런 거랑에 가끔, 아주 가끔씩 가설극장이 온다.

우리 마을은 신작로를 따라 들어선 여러 마을들 중에 가운데 쯤에 있었다.

그래서 가설극장은 꼭 우리 마을 앞 거랑에 선다.

트럭 한대가 거랑에 장비를 내려놓기 시작하면 벌써 가슴이 설렌다.

기둥을 세워 천막을 담장처럼 두르고 스크린을 걸고 날짜별로 상영할 영화포스트를 걸어놓으면 극장이다.

포스터 속에는 윤정희, 문희, 최무룡, 신성일 같은 주연 배우도 있었지만, 짙은 선그라스에 가죽장갑 낀 박노식, 허장강과 같은 개성파 배우가 더 멋지게 보였다.

한쪽에서 영사기, 발전기를 점검하는 사이 한 사람은 트럭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가설극장이 왔음을 알린다.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가며 상영할 영화를 소개하면서 총 천연색이라는 것도 특별히 강조한다.

동네 꼬마들은 신작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 트럭을 쫒아 다녔다.

 

가설극장 안에는 제대로 된 자리도 없다.

거랑 자갈밭에 비료포대 깔고 대충 앉아야 했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당시에는 건전지로 작동해야만 하는 라디오가 세상 소식을 듣는 유일한 창이었다.

그러니 영화 시작 전에 상영되는 대한 늬우스라는 국정홍보물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뭘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천정은 개방되어 있으니 하늘에 별도 보였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스크린에도 비오듯이 떨어졌지만 영화는 당연히 그런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랫마을 윗마을 남녀노소가 모여 앉아서 모두들 울고 웃기도 하고 숨죽이며 보았다.

영화 상영 중간에 필름이 끊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꼭 결정적일때 끊어진다.

영사기사가 재빨리 필름 양쪽을 잘라 달인의 솜씨로 붙였다.

그 1~2분을 못 참는 사람은 꼭 돈 내달라는 말로 재촉하곤 했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몇 번 잘린 영화는 내용 연결이 잘 안되거나 배우들의 동작이 갑자기 건너뛰는 경우도 많았다.

가설극장에 들어 올 때는 입구가 있었지만 영화가 끝나갈 무렵이면 둘러싼 천막을 미리 걷어 올려주어 사방이 출구가 되었다.

우리집 앞 신작로에는 영화가 끝나면 귀가하는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나는 일주일 정도 머무는 가설극장에 한번 밖에 갈 수 없었다.

가난한 농촌 살림이라 주변 친구들도 다들 그랬다.

그러니 상영 예정 영화포스터를 보고 재미있는 것을 하나 골라야만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모두 영화 이야기였다.

못 본 애들은 부러운 눈으로 영화 줄거리를 들었다.

친구들 중에는 천막을 들추고 몰래 들어가 보았다는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기가 주인공인 듯 책상 위에서 뛰어내리며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때 네살 아래 어린 동생은 낮에 가설극장에 붙은 포스터를 둘러보고 와서는,

자기는 낮에 다 보았다며 저녁에 왜 불켜고 보러가야하는지 한 동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어쩌다 한번 거랑에서 보았던 가설극장의 영화는 눈과 귀에게 베푸는 호사였고, 이 보다 큰 오락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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