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중 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한 녀석이 열심히 연습장에 무엇을 적어댄다.
무얼 하나 하고 힐긋 보니 같은 낙서를 계속 해댄다.
그게 뭐냐고 다그치니 머뭇거리며 사인연습을 한다고 한다.
'선생님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 적는 줄 알았더니 딴 짓하고 있었구나'
혼을 내자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녀석에게
'그래 나중에 하루에도 수십번 사인을 해줘야 하는 사람이 되거라'하며
다독거리고 수업을 계속 했다.
지금까지 나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인을 만들어 봤다.
한글, 한자, 영어로 각각 만들어도 보고
모두 섞어서도 해보고
만든 사인을 몇 번 써먹다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만들고...
지금도 사실 더 멋있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예전에 쓰던 책을 뒤적이다 보면 그때 만든 사인이 떡하니 적혀 있어
이렇게도 만들었었나 하고 웃기도 한다.
아마 이런 기억은 누구나 한번쯤은 있으리라 본다.
교무실에선 아직도 사인보다 도장이 손쉽다.
마흔을 넘긴 지금도 사인은 익숙지 않다.
가끔 학생들 책이나 노트검사 할 때는 사인을 쓰는데
몇 백명 하다보면 처음과 끝에 하는 사인이 조금 달라져 있기도 하다.
올해부터는 교사신분증에 있는
바코드를 사용해서 학교식당 이용한 식대를 계산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식권에 사인을 했다.
식권은 한 달치 모은 뒤 묶어서 뒷면에 식대가 얼마라고 계산해서
다시 내게로 돌아오면 이번 달 식대가 확인되는데
사인을 해놓은걸 보면 그 날의 상황과 내 기분이 짐작 가기도 한다.
또박또박 내 이름 적어놓은 사인은 수업 없는 4교시때 여유 있게 점심식사
할 때 한 사인이요.
바람에 날리듯 휘갈겨 놓은 사인은 배고픈 점심시간때 한 것일 테고,
성 빼고 이름만 적은 건 뒤에 사인하려는 선생님이 줄지어 서 있을 때다.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에 가면 마을유물전시관이 있다.
그곳 전시물 중에는 조선시대 호적단자가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호적에 기재된 내용이 틀림없다는 호주의 사인과
기계현감 사인, 경주부윤 사인이 호적 왼편 구석에 차례로 있는데
지체에 따라 사인의 크기도 다르다.
이렇듯 옛 사람들도 사인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인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해두는 표식일 거다.
내 인생의 자서전 끝에 나도 굵은 사인 하나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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