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면(麵)

석탈해 2009. 8. 31. 13:36

'붕~'하고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이 진동을 한다.
열어보니 아내가 보낸 문자다.
'동서네가저녁에냉면먹으러가재'
휴대폰 문자는 띄어쓰기가 아예 없다.
보는 사람이 알아서 띄어쓰기해 보라는 얘기다.
'냉면이라…….좋지!'
연일 섭씨 35~6도를 오르내리는 요즘날씨라.
냉면 먹으러 가자는 소리에 대번에 시원한 냉면육수가 머리에 그려진다.

여름철 해거름에 어머니는 앞마당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자주 칼국수를 만들었다.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 넙적하게 만들고 밀가루를 뿌려 붙지 않게 몇 번 접은 뒤 칼로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내면 칼국수 면발이 만들어졌다.
여름에는 큰 채에 있는 부엌 아궁이에는 불을 지피고는 잠잘 수가 없다.
그래서 마당에 걸어둔 백철솥에 불을 지펴서 음식을 만들었다.
멸치로 다시물을 만들고, 면을 넣고 감자, 호박, 파 등을 썰어 넣어 푸짐하게 끓여 낸다.
개울가에 놀다 들어온 우리는 솥전에서부터 나는 구수한 냄새에 군침이 절로 돌았고 허기는 더욱 돋워졌다.
이쯤 되면 두 그릇 정도는 뚝딱 비워낼 수 있었고, 먹다 남은 칼국수는 여름날 기나긴 저녁시간의 출출함을 달래는 밤참이 되었다.
열무김치와 곁들여 별똥별 떨어지는 평상에서 먹는 칼국수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집에 국수장국 냄새가 넘쳐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할머니이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국수를 무척 즐기셨다.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면(麵) 종류라면 모두 좋아하셨다.
예전엔 결혼식이나 회갑연 등의 잔치는 대개 집에서 했다.
지금처럼 부조금이 따로 없었다.
그저 친인척들이 각각 음식을 해오면 잔칫상이 차려졌다.
어떤 친척은 떡을, 어떤 친척은 식혜를, 어떤 친척은 유과를 이런 식으로 나누어 맡았다.
그 시절 잔칫집에 꼭 등장하는 것이 국수다.
미리 삶아 채반에 건져놓은 사리를 국수장국에 넣고 고명과 양념을 얹어 말아내면 된다.
값싸고, 가장 간편하고 손쉽게 손님을 접대할 수 있어서 그랬을 것 같다.
친척이나 동네잔치에 가면 할머니는 겸상에 올라온 국수 면발을 빨아 당겨야 더 맛있는지 쪽쪽 하는 소리를 내며 드셨고,
우리도 옆에서 같은 소리를 내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비워냈다.

할머니는 라면도 즐기셨다.
덕분에 대부분 논밭의 먹거리로 자급자족하던 시골이었지만, 돈 주고 사야 하는 흔하지 않은 라면을  가끔 먹을 수 있었다.
라면 한개 끊이면 양이 많이 나오지 않으니 식구 수를 생각해서 국수 한줌 더 넣었다.
나는 라면 그릇에서 꼭 꼬불꼬불한 라면부터 먼저 골라 건져 먹었다.
어차피 다 먹을 것이면서도 국수보다 라면이 더 맛있게 보였다.

대물림인지 첫째 아들은 엄마뱃속에서부터 냉면을 좋아했다.
첫째를 가졌을 때 배부른 아내가 전화해서 냉면 좀 사오라는 주문을 많이 했다.
포항에서 냉면으로 유명한 집이 있다.
꼭 그 집에 가서 사오라고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서 포장한 냉면을 식기 전에(?) 가져가 대령했다.
그래서 그런지 밥 없으면 못사는 줄 아는 둘째와는 달리 첫째 녀석은 면 종류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길들여진 입맛은 평생 간다고 한다.
얼마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잔치국수를 먹어보았는데 영 그때 맛이 아니다.
'쪽'소리 내며 한입 가득 빨아 당겨 먹어보아도 아닌 건 아니다.
하물며 요즘에 나오는 서양국수가 내 입맛에 맞을 리 없다.
파스타는 뭐고 스파게티는 뭔지......
젓가락이든 포크든 간에 손이 안 간다.

오늘은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달래야겠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본도 모르면서...  (0) 2009.09.03
옛날 옛적 호랑이 전화 걸던 시절에.  (0) 2009.09.01
스타크래프트  (0) 2009.08.31
양철 지붕 집  (0) 2009.08.31
사인(sign)  (0) 2009.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