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양철 지붕 집

석탈해 2009. 8. 31. 13:27

조용하던 교실이 학생들의 괴성으로 소란스러워 졌다.
교실에 불법 침입한 생쥐 한 마리를 두고 벌어진 소동이다.
학생들은 교실 구석으로 생쥐를 몰아가면서도 누구하나 선뜻 잡아내지는 못하고 소리만 질러댄다.
남학생, 그것도 덩치가 산만한 고등학생들이 생쥐 한 마리 두고 한바탕 전쟁을 벌인다.
아예 책상위에 올라가 있는 녀석도 보인다.
오늘 낮에 교실에서 있었던 한 바탕 쥐 소동을 보면서 불현듯 옛날 우리 집이 떠올랐다.

옛 우리 시골집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집이 헐리고 집터의 일부가 현재의 도로 아래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밭으로 만들면서 흙을 돋우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당시 아래채는 주홍색 페인트가 칠해진 양철지붕이었다.
남향을 보고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큰 채와는 달리 방문이 서쪽을 향해 있었다.
비 내리는 날 방안에 앉아 있으면 양철 지붕에 부딪치는 빗소리는 빗줄기에 따라 달라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는 지붕을 사뿐히 밟고 소리도 없이 추녀 끝으로 떨어지지만 빗방울이 좀 굵은 가랑비는 가는 모래를 퍼붓는 소리가 되고, 장대비, 소나기 소리는 심술 난 먹구름 영감이 냇가에서 퍼온 자갈을 한줌씩 지붕에 세차게 뿌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여름날 아침햇살이 마당에 내린 이슬을 말리기 시작하면 안개처럼 피어나는 아지랑이에서는 흙 마당 특유의 냄새가 났다.
담장 밖을 내다보던 해바라기가 열심히 해를 쫒아가는 시간이면, 후끈하게 달아오른 햇살에 흙 담 위의 호박잎도 어깨를 축 떨구었다.
이쯤 되면 양철지붕도 서서히 열을 받아 '쩡~쩡~'하며 더위에 지친 신음 소리를 냈다.
양철 지붕은 양은 냄비처럼 쉽게 열을 받는다.
여름철 한낮이면 우리 집 아래채는 지붕의 열기 때문에 항상 더웠다.
궁여지책으로 방 위쪽에 합판으로 평편하게 막아 중간 천정을 새로이 만들었다.
서까래와 방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지붕의 열을 좀 차단해 보려는 심산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붕과 천정사이는 제법 넓은 틈이 생겨, 그곳은 쥐들의 천국이 되어 버렸다.
흙벽을 뚫고 들어와 천정위에서 생활하는 쥐들의 공간은 천적인 고양이들이 감히 접근해 사냥 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가 되었고 밤이면 쥐들의 경주장이 되어버렸다.
이리 저리 '우당탕탕' 하고 몰려다니며 '찍찍' 소리를 냈다.
가만히 누워 소리를 들으면 천정의 엷은 합판위에 어느 곳을 쥐들이 지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름 더위 때문에 잠들지 못하던 방이 이제는 쥐들의 줄달음질 소리에 잠자기 어려운 방이 되었다.

쥐들을 잡기 위해 천정의 일부를 뜯어 그 위에 쥐약을 올려두어도 별 효과가 없었다.
동네의 어느 어르신께서는 의심이 나는 음식물은 쥐들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쥐가 먹어 보고 괜찮으면 나머지 쥐들이 먹는다고 했다.
별로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그런 날은 꾀가 많은 쥐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 인간들에게 성토라도 하듯이 더욱 더 몰려다니는 소리가 났다.
동네 운동회가 아니라 아예 올림픽을 개최한 듯 했다.
억수비 내리며 천둥치는 날은,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쥐 소리를 압도해버려서 그런지 모르지만, 쥐들도 숨을 죽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전국적으로 쥐 잡는 날이 있었다.
쥐 잡는 주간에는 동네 이장님이 집집마다 쥐약을 나누어 주었고, 학교에서는 잡은 쥐꼬리를 잘라서 학생들에게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많이 가져오는 학생은 부상으로 공책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책 타려고 친구들끼리 경쟁을 하였고 이웃에서 잡은 쥐 까지도 얻어서 삽으로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갔었다.
그때는 물론 쥐 때문에 책상위로 뛰어오르는 친구들은 없었다.

대학시절 서울 작은집에서 생활을 할 때는 집이 골목 안 단독주택이었고 작지만 아담한 정원이 있었다.
어쩌다 정원을 휙 하고 가로지르는 쥐들 중에는 정말 덩치가 큰 녀석도 있었다.
지금도 애들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 '톰과 제리'가 당시에도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는데 서울쥐는 덩치가 고양이만한 것도 있어서 제리의 탈을 쓴 톰과 같이 보였다.
기름진 것을 많이 먹어서인지 비만에 가까운 쥐들도 많았다.
가끔씩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쥐들이 있어서 소탕작전을 벌일 때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부비트랩 같은 끈끈이가 동원되기도 하고 작은아버지는 싱크대 뒤 쪽에 숨은 쥐를 공기총으로 겨누어 잡기도 하였다.
만화를 볼 때는 약자인 생쥐 제리 편을 들었지만 실생활에서는 고양이 톰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인간인 듯하다.


최근에 이사를 했다.
아파트 1층에 살다가 2층으로 왔는데 초등학생인 아들 두 녀석이 슬슬 신경이 쓰인다.
애들은 별 생각 없이 1층에서처럼 발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닌다.
하지만 아래층 사람들에게 피해줄까 봐 매번 주의를 시킨다.
"여기 일층 아니다. 뛰지 마라. 조용히 걸어라…."
밤늦은 시간에는 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애들이니 당연히 뛰어다니며 노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인데 아파트라는 이유 때문에 부모는 매번 애들의 욕구를 자제시키느라 바쁘다.
어떤 때는 아파트 시공사에게 화살을 날려보기도 한다.
아파트 지을 때 애초부터 좀더 층간 두께를 두껍게 해서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하면 안 되냐고 따지고 싶다.
우리 시골집 아래채처럼 위 아래층 바닥을 합판처럼 얇게 해 두었으니 이거 조심스러워 살겠나하고 말이다.
내가 때로는 합판위의 쥐가 되기도 하고, 천장 아래에 사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게 아파트에서 사는 모습인 것 같다.


얼마 전 층간 소음 때문에 벌어진 사소한 시비로 살인사건까지 벌어진 뉴스를 보았다.
참을 인(忍)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데 조금만 참고 서로 이해하면 될 것을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 위층에도 우리 아들 또래의 애들이 있다.
애들이 뛰면서 나는 발소리가 콩콩하고 천정을 통해 울려서 들리지만, 우리도 애들 키우는데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위층 사는 사람이 제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아래층 사는 사람이 톰이 되어서도 안 된다.
어린시절 우리 집 아래채 천장에서 쥐들이 내는 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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