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나무

석탈해 2009. 10. 19. 14:37

  오전에 가을 비가 내리더니 저녁은 한기가 돌 정도로 쌀쌀해 졌다.
야간 학습 감독을 하며 복도를 순회하는데 학교 뒷산에 쏴아∼하고 파도 소리가 났다.
본관 3층에서 내려다 보니 뒷산 절개지에 심어놓은 대나무가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잎들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였다.
대나무 잎들이 내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의 어린시절이 뇌리 속에 물결처럼 밀려왔다.

  우리 마을 뒤에는 '신우대'라고 불리는 대나무가 있었다.
신우대는 그리 굵지도 크지도 않고 촘촘히 어우러져 자라는 탓에 울타리로 적합했다.
변변찮은 장난감 하나 없는 내게 대나무는 늘 좋은 놀잇감 재료였다.
낚싯대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물총과 포구총을 만들어 편을 갈라 총싸움도 했다.
포구총은 신우대 마디 양쪽을 잘라서 위아래가 통하게 하고 대나무 구멍에 들어가는 적당한 줄기로 손잡이를 만들면 완성된다.
우리 집 옆에는 한 그루의 늙은 포구나무가 있었다.
여름이 되면 대나무 구멍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열매가 열렸다.
이 포구나무 열매로 포구총 앞뒤를 막고 손잡이를 밀면 공기가 압축되어 어느 순간 "뻥!"하고 앞쪽에 막았던 열매가 날아갔다.
70년대 중반,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우리또래 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나시찬이라는 배우가 주연하던 '전우'였다.
그 드라마 속의 전투 흉내를 내며 곧잘 놀았다.
그 시절 대나무 물총이나 포구총 하나면 여름이 내내 즐거웠다.

  겨울이면 연날리기를 하였는데, 대나무는 연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될 재료다.
신우대를 결대로 가늘게 쪼개고 칼로 거친 면을 다듬어 길죽납작하게 만들었다.
밥풀을 짓이겨 신문지에 담아 쥐고, 다듬은 대나무 재료를 찔러 넣고 반대로 빼내면 적당히 나무에 풀이 칠해진다.
요즘 문방구에 파는 풀로는 그런 접착력이 나오지 않는다.
밥풀로 해야 제격이다.
풀이 칠해진 대나무를 미리 재단해 놓은 한지에 붙여 연 모양을 만든다.
방패연은 만드는 게 복잡하고 대나무 살도 많이 만들어야 하기에 살이 두개만 있으면 되는 가오리연을 주로 만들었다.

  대나무는 우리들의 노래 속에도 있었다.
'뽕나무가 뽕, 대나무가 대끼놈, 참나무가 참아라'
원래 노래에서 재미있는 문장만 추려 합창하듯 부르며 동네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어린시절 내 추억의 한켠에는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가 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에 애들을 데리고 갔었다.
민속촌 한쪽에는 대나무 물총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잘라놓은 대나무통에 구멍을 뚫는 것과, 대나무 손잡이에 천을 감아 압축력이 생기게 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치 인스턴트 식품처럼, 인스턴트 대나무총을 보는 듯 했다.
대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그런 수고를 애들이 알 리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야! 너 일루와!...왜 할일 없이 왔다 갔다 하노, 책상에 가만 앉아서 공부 해...'
'학교 자러 왔나...정신 좀 차려라!'
오늘도 나는 산사(山寺)의 선방(禪房)에 죽비 들고 선 스님처럼 대나무로 만든 단소 하나 들고 야간학습 감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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