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야기

외솔배기

석탈해 2011. 8. 10. 08:59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내연산 깊은 골, 물과 물들이 합류하는 곳에 가랫골과 시명리라는 오지 마을이 있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예로부터 띄엄띄엄 화전민이 밭을 일구고 살았다.

고개 넘어 바삐 걸어 3시간 거리인 청하에 5일장이 서면 옥수수, 감자 보따리 이고 지고 동트기 무섭게 출발했을 것이다.

장에서 팔건 팔고, 살건 사고 점심 겸 칼국수 한 그릇 하고 나면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세상으로 통했던 유일한 길을, 혼자 걸으면 범 짐승이라도 나타나 흙이라도 퍼부을 것만 같은 길을 가야 한다.

같이 온 몇 사람이 모여서 숨 가쁘게 고개를 넘으면 산마루에 있는 정자나무 외솔배기가 반긴다.

이제는 산을 내려가는 일만 남았으니 마음도 놓인다.

흘린 땀도 훔치며 외솔배기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면 뒤따라 온 이웃 주민도 합류해서 노랫가락이 절로 흘러나왔다.

외솔배기는 함부로 하거나 베면 목숨까지 잃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신령스러운 나무였고,

여인들이 애기를 점지해 달라고 빌면 효험도 보았다고 한다.

 

 

 

사실 오늘 예정에 없었다.

태풍 여파로 아침까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점심 무렵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이 개었다.

옆자리 이 선생님이 이런 날 산행해야 한다고 한다.

준비를 안 해 왔다고 하니 자신의 차에서 운동화 한 켤레를 꺼내 놓고 가자고 한다.

그래서 오늘 또 내연산에 올랐다.

지난번과는 다른 코스로 내연산수목원에서 출발해 매봉아래를 통과해 계곡으로 내려가 삼거리 거쳐 삿갓봉으로 올라

원점으로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삿갓봉으로 가는 길에 외솔배기가 나온다.

외솔배기 아래에서 머물며 발견한 흙이 들어간 갈색의 금복주 소주병이다.

금복주는 예전에 대구.경북지역에서 주로 판매되던 소주이다.

갈색병으로 된 금복주가 출시된 시점을 검색해보니 1970~80년도 사이에 생산된 것 같다.

그러면 30년 정도 된 소주병이다.

지금은 집터와 밭뙈기 모두 잡초와 잡목이 지우개로 지우듯 흔적을 지워버렸지만

가랫골에 사람이 살 때 장에 갔다 외솔배기를 넘으며 한잔하고 버린 것 같다.

그때 굳은 살 박힌 손에 들렸던 소주병은, 30년 지난 지금 길손이 다시 찾아 들고 그 속에 담긴 세월의 흙을 쏟아 부었다.


흙이 날린다.

지난날 외솔배기 품속에서 떠들썩했던 이야기와 웃음이 먼지가 되어 날린다.

세월을 토해낸 빈병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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