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져재 녀러신고요?

석탈해 2011. 11. 21. 16:44

 

[사진: 포항시 홈페이지 사진자료실에서 퍼옴]

 유리가 귀했다.

쪽 유리로 쓸 수 있는 것은 밍경(面鏡-면경)이라 불렀던 거울 뿐이었다.

밍경 깨진 것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했다.

밍경에 자를 곳을 정해 명주실로 감고 실에다 석유를 묻힌 뒤 불을 붙였다.

불이 꺼져갈 무렵 세수 대야에 담긴 찬물에 넣으면 ‘짱’하고 명주실 따라 유리가 갈라지는데 삐딱하게 잘릴 때가 많았다.

시멘트 덧 쉬운 쭉담에 날카롭고 삐뚤삐뚤하게 잘린 부분을 갈아내면 그런대로 네모난 모양이 된다.

거울 뒤에 칠해진 유약을 납작한 쇠붙이나 동전 등으로 긁어낸 뒤 창호지 바른 여닫이 한쪽 문살위에 붙이고 가장자리를 네모나게 창호지로 발라 쪽 유리창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두면 방에 앉아서 방문을 열지 않고 밖의 동정을 살필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CCTV다.

단, 다시 되돌려 볼 수는 없다.

작은 유리 한 장이 카메라고 모니터다.

네모난 쪽 유리창으로 마당가 감나무 아래 떨어진 홍시도 확인하고, 바뿌재처럼 내리는 함박눈을 보고 좋아도 했다.

시내로 가는 버스가 지나가면, 장에 갔다 오시는 할머니가 이 번 버스에서 내렸는지도 쪽 유리로 알았다.


내가 살던 고향은 면 소재지로부터 십리나 떨어져 있었다.

5일장이 면 소재지에 서는 날이면 새벽부터 분주해 진다.

전날 저녁에 이미 내다 팔 곡식이며 채소를 보자기에 싸서 챙겨 두었지만, 새벽 으스름에 지나는 첫차를 타야 했기에 그랬다.

일찍 장에 도착해야 몫 좋은 곳에 전을 펴서 빨리 팔수 있어서다.

처음 지나는 버스는 ‘일반차’라 그랬고, 두 번째 지나는 버스는 ‘이반차’라 그랬다.

아마 그날 처음 오는 버스를 1번차, 그 다음 차 시간에 오는 버스를 2번차라는 의미로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장이 서는 날 새벽 버스는 항상 만원이다. 

버스에는 운전사 외에 차장(안내양)과 무거운 짐을 실어 주거나 운전사 보조를 하던 조수가 있었다.

장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사람 탈 공간도 없다며 조수가 태워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기에 신작로를 따라 소 수레가 워낭소리 딸랑 거리며 지나면 장꾼들이 부피 큰 짐을 맡겼다.

버스에 실을 수 없는 큰 짐은 대개 운임 몇 푼 받고 소 수레가 맡았다.

시골집에 있는 수십 년 된 낡은 평상도 그 시절 장터에서 구입해 소 수레로 실어 왔었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당시 경제권은 할머니가 쥐고 계셨고, 5일마다 돌아오는 장에도 주로 할머니가 가셨다.

어쩌다 따라가 본 장터는 또 다른 세계였다.

장터 한 쪽에서 뻥튀기 기계가 한 번씩 내지르는 ‘뻥’하는 소리에 무심코 있다가 놀라는 사람들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콩 파는 아주머니 옆에는 토종닭 두 마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날개가 뒤로 꺾인 상태로 포박되어 불안하게 눈을 껌뻑 거리며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난전 옷 가게 앞줄에는 가장 잘 팔리는 월남치마와 몸빼 바지가 진열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정 고무줄에서 부터 손톱깎이 등 잡화를 파는 리어카 옆을 지나면 세련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장터 맨 안쪽에는 시골 장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우(牛)시장이 있었다.

시장 안 찐빵 집 양은솥에서 나는 구수한 빵 냄새가 장꾼들을 유혹했다.

설탕 살살 뿌린 찐빵 맛은 두고두고 생각나 입맛을 다시게 했다.

설빔으로 옷과 신발을 사기도 했다.

운동화는 명절이나 오늘처럼 특별한 외출 때 신었다.

평소에는 고무신이다.

아버지 검정 고무신은 10문 반, 나는 9문을 신었다.

나는 더 클 것을 감안해 발 보다 좀 큰 사이즈를 샀다.

설날이 되어야 설빔으로 산 옷을 입기 시작하기에 더욱 설날은 기다려졌다.

그 사이에 새 옷을 몇 번 입었다 벗었다 했다.


신작로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집으로 돌아오는 장꾼들을 실은 버스가 지났다.

쪽 유리 너머로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보인다.

짐이 많으니 받아가라는 것이다.

마루에 장 보자기를 내려놓으면 달려들어 할머니가 사 오신 군것질 거리부터 찾았다.

식어버린 국화빵, 강냉이 한 봉지, 까만 김이 주근깨처럼 박힌 센베이 과자.....

"내 새끼 먹이“라고 할머니가 표현했던 군것질 거리는 그 자리에서 먹고 바닥이 보여야 물러나 앉았다.

지금도 형광등 진열장에 놓인 도시의 대형 할인매장의 물건보다도, 말하기에 따라 할인도 되고 덤으로 주기도하는 사람냄새 나는 5일장의 물건들이 더 정감이 간다.

하루 종일 떠들썩했던 축제 같은 5일장이 지금은 대형마트에 밀려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아쉽고, 인근에서 유명했던 우리 고향 장날은 이제 도깨비처럼 열렸다 한 나절이면 끝나기에 더욱 아쉽다.

옛날에 그렇게 맛있었던 장터 음식이나 군것질 거리도 지금은 그 맛이 안 난다.

쪽 유리에 뿌연 입김 서리도록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것이 아니기에 그런지, 아니면 입이 변하고 사람이 변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그 옛날 장날, 장터에서의 추억이다.


“져재 녀러신고요?”

“시장에 가 계신지요?”라는 뜻으로 백제 가요 「정읍사」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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