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석탈해 2012. 4. 3. 17:44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8개월입니다.

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겨우 걸어 다닐 때 데려왔는데 고양이 나이로는 벌써 성년이 되었습니다.

백옥 같은 하얀 피부에 노란 털가죽을 머리에서 엉덩이 까지 덮어쓰고 배는 귀족스럽게 약간 나왔지만 식탁, 싱크대, 책장 위로 날아다닐 정도로 민첩해 졌고 또한 날렵합니다.

낮에는 주인 없는 집을 혼자 지키면서 주로 잠을 자다가, 식구들이 오면 온갖 재롱을 떨어서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습니다.

문제는 벌써 두 번 발정 온 것을 넘겼는데 세 번째 발정이 온 것입니다.

아파트라는 막힌 공간에서 울어댄다고 남자친구가 올 리가 없습니다.

손길이라도 주면 엉덩이를 낮추고 사랑해 달라고(?) 낑낑댑니다.

가끔은 베란다 창 앞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만 하염없이 바라다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종족 번식욕구가 있는데 인위적으로 막아두고 있으니 미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도 인생(人生)이 있고, 고양이도 묘생(猫生)이 있는데 말입니다.


 

2주전 토요 휴무일 아침에 애들 둘이 학교가고 집사람만 있었는데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남자친구 만나게 해 주러 간다면서 먹다 남은 사료 봉지를 들고 향기를 상자에 넣었습니다.

남자친구 만나러 가는데 사료 봉지는 왜 가져가느냐는 집사람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고향집이 저희 집에서 차로 달리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습니다.

자라면서 두 번 정도 향기를 고향에 데려갔다 온 적은 있습니다.

물론 고향집에는 여전히 새끼 한 마리를 거느린 어미 고양이가 마당에 살고 있습니다.

텃세를 잘 이겨 낼까라는 걱정도 조금 들었습니다.

그래도 마당 있는 집에 살면 남자친구라도 만날 것 같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절대로 동물을 사람 사는 집안에는 들여놓지 않는다는 주의입니다.

그래도 적응을 위해 현관에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한쪽에는 볼일 보는 자리도 모래를 채워주었습니다.

돌아서면서 잘 지내라고 몇 번 당부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왔습니다.

돌아오니 집사람은 물론 애들도 학교에서 돌아와 모두들 섭섭해 합니다.

휴대폰에 저장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리워들 합니다.

다음날이 일요일입니다.

교회 갔다가 집사람과 둘째가 시골집에 어머니 보러 갔다 왔다 합니다.

실제로는 향기 보러 갔다 온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 주 지나서 지난 일요일에 고향집을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향기가 3일을 집을 나가 안 돌아와서 애를 태웠다고 합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이라 찾으려고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녀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동네 사람들에게 향기의 인상착의(?)를 말하고 현상수배도 내렸다 합니다.

그리고 3일 지난 후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제발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사료주고 귀여워 하니 따라다닙니다.

고향집에 있던 고양이들도 어머니 옆에 붙어서 귀염을 받고 있는 향기를 인정하는 모양입니다.

아예 축사 주변에 아지트를 만들어 삽니다.


 

우리가 부르니 다가옵니다.

잊지 않았나 봅니다.

하기야 2주 만에 잊었다면 배은망덕이지요.

베란다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립니다.

평소 애교 부리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나물 캐러 텃밭에 가니 거기까지 따라와서 주변을 맴돌며 장난을 칩니다.

밭 끝에서 반대편까지 먼지가 나도록 달립니다.

자연 속에서 뛰고 뒹굴고 하는 모습을 보니 행복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작별인사 하기위해 축사로 가보았습니다.

고향집에 있던 다른 고양이와 놀고 있습니다.

불러도 한번 돌아보더니 다른 고양이가 간 쪽으로 쏜살 같이 달려갑니다.

적응 참 빠릅니다.

이제 한시름 놓았습니다.

부디 다른 고양이들을 벗 삼아 자연과 더불어 늘 행복한 향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집으로 오니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뽀얗던 털에 연탄재 같은 때가 묻어 있었던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다들 휴대폰에 찍어온 향기 동영상을 봅니다.

“향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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